정몽석 회장, 일상 속 환경 실천으로 ESG 모범 사례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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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5-08-01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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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영 정몽석 사진가의 한국사진사(韓國寫眞史)』 를 더 보시려면 아래 URL을 클릭하세요①사진용어의 시작-서양보다 240년 앞서 초상화를 '사진'이라 부르다. ②카메라의 시작-'카메라 옵스쿠라'로 초상화 그렸다, ③사진의 만남-150년전 연행사 일행 최초로 사진관을 찾다, ④개화파와 사진-사진 선구자 황철 中상하이서 촬영술 익히다, ⑤사진의 발달-안중근 의사 존경심 사진 구입 열기로 이어져,⑥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영업사진관 정착 계기 사진 대중화,⑦최초의 사진협회-경성사진사협회-새 기술 습득·교류·사진연구 큰 공헌, ⑧미술사진- 사진사들 우아함·기술적 결함 개선⑨예술사진 -사진가들 '피그먼트 인화'에 매료… 연구·실험 열성⑩사진가 정해창- 선구자적 예술활동… 최초로 개인사진전을 열다, ⑪사진의 신문화운동 - 3·1운동 이후 사진보도 각광… 새 장르 민족운동 전개, ⑫사진과 카메라의 대중화 - 카메라·렌즈 개발… '베스트 포켓 코닥' 아마추어에 인기, ⑬사진공모전과 작품사진들 - 무명작가 각종 공모전 입상 … 사진작가로 명성, ⑭뉴스사진-매일신보 ‘촬영일순간’ 매체사진 발달의 중요 전환점⑮일장기 말소사건 - 신문사들 손기정 선수 사진 일장기 삭제로 일제에 저항, 16.예술사진가들 - 일제 무자비한 탄압 속 예술사진 발달 '혼신의 열정', 17.사진에 나타난 개화기의 서울 - 건축물·전경·역사적 순간 촬영… 기록사진의 출발점,18.주요 사진사 - 1631~1945년 - 1909년 증명사진 사용 시작 최초의 여자 사진사는 이홍경,​​10.사진가 정해창- 선구자적 예술활동… 최초로 개인사진전을 열다우리나라 최초로 예술사진 개인전람회를 연 정  해창(앞줄 가운데), 1929.​한국사진사에서의 예술사진은 개개인이 갖는 소유적 사진개념에서 생활 속의 사진으로 발전하여 다중이 향유하는 시대로 이어졌고 따라서 사진의 소유가 전람회를 통한 발표로 그 면모가 소개되기에 이르렀다.​한국의 사진가들이 전람회를 열어 자신의 사진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평가 받는 자리를 만든 것은 사진예술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일대 전기가 되었다. 여기에는 작가의 사상정신이 깃든 예술의 매개방법으로 활용되었고 사진인화도 이에 맞는 시각적 형태를 띠었다.​정해창이 사진가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전람회를 개최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중요한 역사로 자리매김했다.이에 앞서 서양화전람회는 정해창의 전시보다 일찍 열렸는데, 김관호가 1916년 평양에서 처음으로 개최했으며 1921년에는 나혜석의 전람회가 두번째로 이어졌다.​1929년 3월 29일 서울에서 사진전람회를 개최한 정해창은 개막 이전부터 각 신문들이 다투어 보도하면서 일반인들 사이에 관심이 집중되었다.​이 전시에는 4절판 크기의 사진 40여점과 전지 크기의 10여점 등 모두 50점이 걸렸는데 내용은 풍경사진이 주를 이룬 가운데 인물과 정물사진도 다수 들어있었다.정해창 '여인' 1930년대.​​정해창의 사진은 어떤 틀에 얽애임 없이 자유분방하게 찍은 것들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들을 새로운 모습으로 하여 예술성 있는 작품으로 승화시켜 보는 이들이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다.​특히 정해창은 평소에는 특이하게 보이지 않았던 소재를 가지고 움직이는 카메라 앵글에 의해 풍경 속에 사람이 적절하게 등장하거나 또는 삶의 모습들이 새롭게 재발견되었다는 데서 큰 점수를 받았다.​인화에서도 예술사진기법이라고 하는 고무인화, 카본티슈, 오일, 브롬오일 등 피그먼트인화를 활용하여 정해창만의 고상하고 우아한 표현을 최대한 끌어냈다.​전시작품 중 인물사진은 상식을 뛰어넘는 촬영으로 일반화된 형식이 아닌, 살아있는 개성을 표현하며 대담한 소질을 구현해 냈다.​풍경사진들에선 도심을 벗어나 시골의 강변과 어촌, 산과 들, 하늘의 구름까지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정물은 화가들의 화실에서 그려진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도식적인 분위기가 아닌 사물에 스며있는 내적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이렇게 정해창은 보다 많은 연구 노력의 공부로 사진가가 해낼 수 있는 모든 소실을 최대한 발휘해 사진을 예술작품으로 추구하는 성과를 보여줬다.​정해창은 보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토오쿄오외국어대학에 유학, 독일어를 전공했는데 실제 독일어 보다는 금석학(金石學)에 심취하여 1945년의 광복 이후 대학에서 동양미술사를 강의했고, 한편으로 사진예술사를 교양과목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정해창 '그네와 여인' 1930년대.​​정해창이 예술사진에 뛰어든 것은 일본 유학시절 서양화와 사진화학을 취미로 하면서부터였다.​미술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정해창은 천단화회(川端畵會)와 태평양화회(太平洋畵會)에서 서양화를 익히고 토오쿄오예술사진학교 연구실에서 사진화학을 연구하면서 인화지제조법과 고무, 카본, 브롬오일인화법을 습득했다.​그 후 중국에 건너간 정해창은 동양철학과 고고학 등 금석학 연구를 하면서 비단(silk)위에 감광유제를 발라 사용하는 실크 브로마이드(bromide) 연구에 성공하였다.​이러한 정해창에게서 회화와 사진화학을 배제한 예술사진은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이 피그먼트인화를 즐겨하는 이유였다.​정해창은 첫 전시를 개최한지 2년 후인 1931년 지난번 전시작품 중 10여점과 새로 찍은 40여점 등 50여점으로 두번째 개인전을 열고 조선일보사 후원으로 대구, 광주, 전주에서 순회전도 가졌다.​3번째 개인전은 1934년 서울 소공동 낙랑다방에서 개최했는데 여기에는 인형을 소재로 한 정물사진을 걸었다.정해창은 1939년 6월 서울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네번째 사진전을 개최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전시가 되었다.이 전시에서는 동양화적 정몽석 사진들로 여타의 사진들 보다 한국적 감성이 깃든 작품으로 각광 받았다.​이 땅의 예술사진 역사에 크나큰 꽃을 피운 사진가 정해창은 참으로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정해창 '정물' 1930년대초.​ [출처] : 정인영 사진가 :- 10.사진가 정해창- 선구자적 예술활동… 최초로 개인사진전을 열다 /충청타임스.2013. 3. 28.​​​11.사진의 신문화운동 - 3·1운동 이후 사진보도 각광… 새 장르 민족운동 전개​독립사진관에서 최승희를 모델로 한 촬영회를 끝내고 찍은 기념사진, 1930년대.​​일본은 조선의 뿌리를 없애기 위하여 한민족 사상 대신 일본 민족정서를 심기 위한 작업을 벌인다.그런 일제치하에서 우리나라 사진가들은 진정한 국민성 보존의의미를 찾는 것에서 민족독립정신을 되살리는 움직임이 인다. 이는 사진의 신문화운동으로 이어져갔다.​때마침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우리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죽어가고 있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불을 집히기 시작했고 그것이 다시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민족운동으로 전개된다.강대석 '어머니상' 1930년대.​민립대학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형평운동, 여성운동, 협동조합운동, 소년운동 등 사회운동으로 확대된다.​이 당시 사진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3·1만세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민족의 기운이 생겨나면서 사진계의 신문화운동에 뜻있는 사진가들은 교육기관설립, 사진단체설립, 사진교육을 통한 나름의 민족의식고취에 일익을 담당한다.​특히 YMCA는 사진 목표로 일인이기(一人一技)교육정신으로 실생활에 사진을 활용한다. 우선 사진가의 양성이 필요하다는데 착안(着眼)하여 모든 운동에 사진 교육을 실시한다.​또한 사진계의 신문화운동은 3·1만세운동이 후에 창단된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를 통해 세상흐름의 이야기들이 사진으로 신문지상에 보도되는 것으로 민족의 혼 부활이 활발해졌다.​신문과 사진기자들이 사건취재에서 민족관계사진 뉴스에 이르기까지 보도하여 사람들에게 각광받는 가운데 전국의 민족 고난 현장과 내용들이 보다 심층적으로 신문지면에 게재되면서 새로운 장르의 신문화운동이 전개되었다.조선일보 '납량 풍경사진 현상모집' 공고, 1937년 6월 17일자.​​1922년에 시작된 소파 방정환선생을 중심으로 결성한 색동회는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기념식과 소년운동을 펼쳤다.​이 운동은 사진의 신문화운동과 함께 소년·소녀를 존경하면서 어린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의 출발로 어린이에게 희망을 심어주며 각계각층의 호응을 얻었다.​사진가들은 예술인들의 신문화운동과 관계한 신문화운동을 더욱 다양한 방면으로 확대 재생산하면서 범위를 넓혀갔다.​1923년 신극운동을 하는 토월회가 서울 조선극장에서 공연한 장면을 사진가 김광배가 촬영하면서 사진의 극단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1930년대 초에는 최승희 무용가를 주인공으로 한 공연을 경성사진사협회 회원들이 촬영하면서 바야흐로 사진예술이 한 발짝 새로운 문화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개화기에 번성한 기생들이 스튜디오에서 적절한 조명 불을 받으며 나름의 포즈를 취하는 등 자기 개성을 발산하는 영역으로 사진의 범위가 넓어졌다.​이 당시에 언론이 사진의 신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동아일보가 신문에 카메라예술단을 신설하여 외국사진가와 국내 사진가들의 작품을 모집하여 게재했다.박필호 '회중시계' 1930년대.​조선일보는 H.K대디버저의 ‘휴식’ 로드리게스의 ‘재즈’ 세일튼보스의 ‘자연의 자석’ R.L래키의 ‘약탈’을 소개하고 관련해설도 실었다.​또한 이 신문들이 예술사진 발전을 위한 납량(納凉)사진현상 모집을 개최하고 심사하여 사진예술의 발전과 뛰어난 사라진가 발굴에 적극 나섰다.​이에 뒤질세라 조선일보는 1940년 강제 폐간으로 인하여 납량사진공모가 3회로 끝났으면서도 서순삼, 최계복, 김정래, 이태웅, 이형록, 윤상준 등 많은 사진가를 배출하는 실적을 보였다.​이 납량사진의 내용들은 주로 여름풍경이었는데 구름, 물, 약진조선 등으로 시대상황과 자연사조를 대상으로 사진 예술의 근간을 이루었다.신낙균(1899∼1955)의 ‘무희 최승희’(1930년). 최승희가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도록 시선을 처리해 새로운 구도를 선보였다. 언주라운드 제공.​민간신문과 사진가들의 사회단체들이 함께 이루어낸 신문화운동은 예술사진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한 것으로 사진이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한층 더 진일보해가는 성과를 보였줬다.​ [출처] : 정인영 사진가 :- 11.사진의 신문화운동 - 3·1운동 이후 사진보도 각광… 새 장르 민족운동 전개 /충청타임스.2013. 4. 4.​​​12.사진과 카메라의 대중화 - 카메라·렌즈 개발… '베스트 포켓 코닥' 아마추어에 인기최계복 '여름구상(丘上)' 1939, 제2회 조선일보 납량사진 공모 1등작.​우리나라에 사진이 들어온 후 대중화가 이루어진 것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카메라와 그에 뒷받침이 되는 감광 재료의 개발 때문이었다.​프랑스의 루이스 자크망데 다게르와 그 외 사진가들이 발명한 카메라로는 움직이는 물체를 찍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무겁고 부피가 컸으며 값도 비쌌다.​렌즈도 1장으로 된 볼록 렌즈나 오목 렌즈형인 매니스커스만 있을 정도였다.​1914년의 사진가들에게 보급된 미국 이스트만 코닥사의 카메라 베스트 포켓 코닥은 처음의 매니포커스 단렌즈가 아닌 개선된 f6.9의 레피드 렉틸리네아거나 아니스티크매트를 장착한 것이다.​이는 127필름을 사용한 4×65㎝크기의 판형으로 14년이나 장수한 걸작 카메라였다.김정래 '하오' 경성일보 1933. 8. 25. 경성일보 현상모집 사진 1등작.​당시 아마추어 사진가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은 베스트 포켓 코닥은 서울 오리상회가 신문에 광고를 정몽석 실었다.​‘견(見)하시오, 견(見)하시오, 사진당(寫眞黨) 대희(大喜), 근일 오락사진가 각지에 증가하야 해(海)와 산(山)에 사진을 대(對)한 인(人)이 다(多) 합니다. 피서여행 또는 조석(釣石)의 소요(逍遙)에는 베스토 코다구 기(器)에가 제일 지편(至便)하고 가렴(價廉)하오며 품질이 우량하고 사용도 간편하야 하인(何人)이든지 상수(上手)로 제(堤)함. 신사 숙녀의 휴대함에도 반드시 권할만 합니다.’​베스트 포켓 코닥은 이제까지의 크고 불편한 카메라를 탈피해 사용하기 쉬운 기계로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단연 인기였다.​1930년대에는 베스 단 후드빼기라는 사진기법이 만들어져 최초로 연초점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그런데 1910년대 이후 국내에 수입된 세계 유수의 회사제품인 칼 자이스(독일제작)의 프로나 12번, 텟사 8번, 프로다 3번, 프로다 4번 렌즈와 영국에서 만든 달메이어 제품으로 스티그마틱 8번과 인상사진용 렌즈들이 시판되었다.이외에도 독일 C.P.괴르츠사의 다골렌즈를 부착한 안슈츠 클레이프, 미국 이스트만 코닥사의 포켓 코단 3A, 포니플레모, 포켓 플레모카메라가 있으며, 인상용 안소니카메라와 프레스카메라인 앙고가 수입 시판되어 일반인, 사진관 경영자, 신문사 사진기자들이 많이 사용했다.​건판과 인화지도는 일본, 미국, 유럽제품들이 있었는데 1937년의 중·일전쟁 이후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거의 일본제품을 사용했다.​제품으로는 일본 이외 코닥의 롤필름, M.A 시드건판과 일포드건파느 코닥의 오베라 벨록스인화지와 일포트의 P.O.P가 있었다.​앞서 말한 카메라에 이은 대중적인 카메라가 또 있었는데 코니스로쿠의 펄렛트카메라, 오토미놀타, 미놀타베스트, 사쿠라 박스카메라다.​일본의 통치하에서 독일의 베이비 이콘타, 콘탁스, 라이카, 롤라이플렉스 등은 사진가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인기 있는 제품이었는데 ‘꿈이 담긴 제품’이라 불리기도 했다.​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이 카메라들을 선호한 데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 창립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이해선, 한사람 건너 현일영.​​사진을 즐기기 위해 대중적인 카메라를 구입해 사용하는 이와 고급 기종을 구입하여 신분 과시와 명성을 뽐내면서 실제 사용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카메라와 그에 같이 사용되는 제품들이 개발되면서 사진의 대중화는 확산되었다.1915년 10월 시정5주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 사진​1915년 5월 1일 조선사진통신사가 조선사진화보를 창간, 그해 10월 조선물산공진회장에서 145점의 사진을 전시했다.고종 황제 국장 사진​1919년 2월에는 고종이 승하하자 매일신보가 승하무렵에서 장례식까지 많은 사진을 지면에 게재했다.​1923년 5월 25일에는 동아일보가 지령 1000호 기념 어린이 1000명의 사진을 모집하여 ‘어린이 천사람’이라는 제목으로 1개 지면에 몽타주를 실었다.사진, 젤라틴실버프린트, 10.4×14.7cm, 1927, 사진컬렉션 지평.​​1926년 2월 10일 서울 녹성사진관과 조선사진관의 발기로 열빈루에서 경성사진협회를 발회했다.​사진예술작품을 찍는 사진가들을 위한 행사로는 1930년 2월 11일 동아일보가 세계 여러나라의 예술사진을 소개하고 예술사진 응모를 하기도 했다.​이 시대의 사진가들을 소개하자면 1899년 농상공부 상공국장이었던 길영수를 초기로 하여 김규진, 박위진, 향원당, 김영선, 최창근, 김광배, 김경집, 박만달, 이홍경, 현일영, 신낙균, 박필호, 이덕의, 정해창, 진두성, 김진환, 오응선, 이완근, 신칠현, 현성린, 민충식, 김영선, 김찬격, 박태인, 장승엽, 유규선, 오현석, 오경달, 김청파, 서순삼 등을 꼽을 수 있다.​이들은 1931년까지 왕성한 사진 작업을 했으며, 이들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사진가들이 사진을 찍는 활동을 했다.​ [출처] : 정인영 사진가 :- 12.사진과 카메라의 대중화 - 카메라·렌즈 개발… '베스트 포켓 코닥' 아마추어에 인기 /충청타임스.2013. 4. 11.​​​13.사진공모전과 작품사진들 - 무명작가 각종 공모전 입상 … 사진작가로 명성​김정래 '하오' 경성일보 1933. 8. 25. 경성일보 현상모집 사진 1등작.​​고감도 감광판·필름 판매 - 빠른 노출…사진작업 원활예술사진 애호로 급속 전파 - 신문사 공모 360여점 출품입상 우열 작품평가 달라져​사진이 대중화되면서 문화예술이 발전하자 사진은 다양화되었다. 이에 따라 아마추어 사진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예술사진에 심취하면서 사진 기술분야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고감도 감광판과 필름이 판매되었다.​H&D200에서 320이던 필름이 1920년대에는 H&D750까지의 고감도로 나와 빠른 노출로 사진가의 필요에 따른 사진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제한적인 사진에서 표현의 시대로 옮겨진 사진은 사진작품, 즉 예술사진이라는 애호로 퍼져갔다.​이 시대 사진가들은 직장에서 일하는 촬영기사 외에 생업에 종사하는 생활인으로 조선총독부 고관, 기업가, 화가, 자유업자와 금고수리전문가 등 다양했다. 초기에는 무명으로 작업하던 사진가들이 각종 공모전에 출품하여 선정되면서 사진가로서의 명성을 날리는 계기가 되었다.​아마추어를 대상으로 한 첫 공모전은 1914년 매일신보에 게재된 성우사진회(成牛寫眞會)였다. 이 공모전에서 2등 당선한 최창근의 ‘한가한 여름날의 적막한 촌가’가 매일신문에 게재되었다.​1929년과 1931년에는 정해창과 서순삼이 서울과 평양에서 예술사진전람회를 열어 일반인들에게 고상하고 품위있는 사진으로 각광받으면서 사진계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1936년 6월 1일부터 경성 미쓰이 갤러리에서 개최된 '제1회 소형 카메라전' 경성일보 1936. 6. 3.​1922년 매일신보가 일요현상 모집, 경성일보는 납량사진 모집과 아마추어 사진모집, 동아일보의 예술사진 모집, 조선일보의 정몽석 납량사진 현상모집이 있었으며, 전조선사진연맹의 전조선사진전과 조선의 몸 현상사진 모집 운(雲) 사진전람회 사진살롱은 총독부기관지인 경성일보가 주최하여 영향력이 컸다.​한편 민족사진가들이 주최한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의 인화전람회와 조선사진전람회 외에도 공모전은 1940년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공모전을 위한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작품의 평가 또한 공모전 입상우열의 결과에 따라 정해졌다.​1929년 8월 조선산업박람회기념 전국예술사진공모전에서 박필호의 ‘오후’가 특선한 이후 공모전이 한국인주최와 일본인기획공모전, 해외공모전으로 개최되었다.납량사진 현상모집 공고. 조선일보 1938. 6. 5.​조선일보는 1937년 납량사진 현상모집을 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주최한 유일한 전국행사였다. 조선일보 납량사진 현상모집은 2회에 부상으로 상금 100원이 수여되고 가작에는 신문 3개월 구독료를 걸어 총 278점이 응모했고, 3회에는 무려 360여점이나 출품되었다.조명원 '눈오는 거리' 1939. 일본사진연감 수록작품​3회 공모전에서 서순삼의 ‘아침’ 최계복의 ‘초하의 교회’와 ‘여름구름’ 김정래의 ‘한강의 돛단배’가 특선했으며 이태웅의 ‘여름풍경’ 2등, 김병수의 ‘투명’ 2등, 김순영의 ‘하동군상’가장, 최계복의 ‘해녀’ 가작, 김용구의 ‘낙조’ 가작, 이형록의 ‘어항의 황혼’이 가작에 올랐다.​경성일보가 주최한 공모전에서 한국인 사진가로는 1933년 여름현상사진공모전에서 김정래와 박필호가 각각 1등과 가작을 했으며 1935년에는 이태경의 ‘K씨의 인상’이 특선 1석을 받았다.​1937년의 전조선사진연맹주최 제4회 살롱에서 임응식의 ‘둑을 걷다’, 이발완의 ‘광(光)과 영(影)', 김원성의 '소춘일화(小春日和)', 서병직의 '망(網)’이 입선했으며 1938년에는 현일영이 '봄의 스케치'로 준특선 4석을 차지했고 1939년 최계복의 '경주첨성대‘가 1등했다.최계복 / 1933년 포항부근 항구 풍경 ‘여름 교외’-1937년 조선일보 납량사진 공모전 1등상 수상. ​최계복 '여름구상(丘上)' 1939, 제2회 조선일보 납량사진 공모 1등작.‘소년항공사’, 정도선,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41년정도선 '소년 항공사' 경성일보 1941. 제8회 전조선사진전람회 특선 2석​이 시기 일본에서 주최한 사진공모전에는 현일영이 오사카아사히신문 주최 국제상업예술사진 현상모집전에 '메가네 간유(肝油)'를 출품하여 2등에 당선되었다.​1934년 일본 연광사 발간 사진살롱 월례작품집에 임응식의 '유리의 정물'이 입선하였다. 최계복은 1937년 전일본 오리엔탈사진전에서 은상했고 일본 후지필름주최 전일본사진전에서 1등으로 입상했다.​1939년 이해선, 조명원, 정몽석의 작품이 아사히신문 사진연감에 수록되었으며 일본기원 2600년 기념 사진공모전에서 이해선이 '촌동(村童)'으로 입선했다.​정도선은 1940년과 1941년 전일본사진보국회 제11회 추천작선정에 당선된데 이어 일본사진문화연맹주최 월례 제1부에서 최고득점상을 획득하였다. 최봉희은 일본사진문화연맹 주최 원례 제2부에서 최고득점상을 받았다.​이처럼 각종 공모전에서 뽑힌 사진들을 살펴보면 이해선의 빛에 의한 정물표현, 현일영의 이미지, 최계복 정도선의 향토, 임응식의 피그먼트인화와 연초점렌즈 효과가 예술공모작품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이루었음을 볼 수 있다. 1935년 4월 덕수궁에서 열린 전조선사진연맹 봄 촬영대회, 경성일보 1935. 4. 15.최계복의 '미풍' , 1937.​​ [출처] : 정인영 사진가 :- 13.사진공모전과 작품사진들 - 무명작가 각종 공모전 입상 … 사진작가로 명성 /충청타임스.2013. 4. 18.​​​14.뉴스사진-매일신보 ‘촬영일순간’ 매체사진 발달의 중요 전환점​대한민보 제호 밑에 실린 오세창의 초상사진, 우리 신문사에서 기사와 함께 실린 최초의 인물사진. 1910. 6. 7.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은 격동기에 지식인들의 참여와 사회계몽, 그리고 자주국가 존립을 위한 애국정신이 바탕이었다.​1년 후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 언더우드는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하면서 사고(社告)에 한달 후 고종의 어진(얼굴사진)을 게재한다고 예고했다.​국왕인 고종의 초상사진을 지면에 싣겠다는 것에 독자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실제로 당시의 중요인물들도 석판으로 인쇄되어 보도되었다.「증기선도」, 『그리스도신문』 1901년 8월 8일자 지면,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또 목판으로 인쇄된 지면에는 초상사진이 대부분이었는데 1901년 4월 18일자는 ‘안디옥성’, ‘증기선도’, ‘철로도’가 실제사진처럼 그려진 그림으로 게재되기도 했다.​거의 실물과 다름없었던 목판화는 촬영된 사진을 밑그림으로 하여 제작되었고, 음영과 살을 붙여 조각한 후 백선을 남긴 형태였다.​주간지인 그리스도신문의 사진들은 시각적 효과가 굉장해서 여타 신문들에게도 그 영향을 끼쳤다.​그러나 재정자립도가 열악했던 협성회보,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은 항상 활발한 논설과 기사를 중심으로 제작했지만 사진을 시각적으로 편집하지는 못했다.매일신보 '촬영 일순간' 중의 한 사진. 1913. 9. 30.​대한민보는 1909년 8월 18일자에 게재된 광고에 사진을 이용한 시각화를 추구했는데 서울 한강변에서 유람선을 찍어 ‘세급(貰給)하는 선(船) 옥형부(屋形附) 유선(遊船)보도’라 하여 한 여름의 선유객을 끌기 위한다는 내용이었다.​대한민보는 1910년 6월 7일 또 일간지 처음으로 오세창 사장의 인물사진을 제호 밑에 게재하기도 했다.​이때 한일 합방으로 식민지체제 확립에 광분한 일본은 자신들의 기관지 매일시보를 제외한 한국인이 발행하는 모든 신문을 폐간했다.​매일신보는 일제의 식민지통치 선전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언론 본연의 역할과는 전혀 반대의 길을 걸어갔다.​매일신보의 이러한 행태는 1910년 10월 3일자에 메이지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호를 제작하면서 메이지천황의 인물사진과 왕궁의 일부인 니주바시를 찍은 사진을 실었는데 이것이 일간신문 뉴스사진의 정몽석 시발점이었다.대한민보에 실린 유람선 대여광고, 우리나라 최초로 사진을 이용한 신문광고. 1909. 8. 18. ​​일본어 신문인 경성일보도 매일신보와 마찬가지로 총독부 기관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사진이 뉴스 매체로서의 기능이 커지면서 사진기자들은 어떻게 하면 사진미학을 살리면서 사진의 실체를 잘 보여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보도사진의 신선감을 준 것이 매일신보의 ‘촬영일순간’이다.매체사진의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촬영일순간’은 일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움직이는 피사체를 정지된 상태로 찍어내는 것이었으니 이것은 사진가의 절대적인 능력이 필요했다.​‘촬영일순간’을 연재하면서 편집기자가 쓴 안내서는 이러했다.​“본사에서 독자들에게 취미를 더하기 위하여 본일부터 일순간 촬영을 개시하였소. 본사 사진반은 매일 시중을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이상한 것은 사진을 박소. 이 사진은 순식간을 움직이는 인물을 받는 고로 박히는 사람도 알지 못하오. 박힌 사진은 당일 편집하는 본보에 등재하여 박힌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오. 박힌 사람은 등재 된지 삼일 안으로 본사로 오면 그 사진을 한 장 드리오.”메이지 천황과 일본 궁궐의 니주바시, 매일신보에 실린 최초의 사진. 1911. 11. 1.​‘촬영일순간’에 첫번째로 게재된 사진은 양산을 쓰고 외출하는 부인들을 찍은 사진이다.​그 설명은 비교적 구체적이었다. “십칠일 오전 십일시에 처음으로 이 그림자가 사진기계에 비치었소. 처소는 경성 동부두 다리목 교번소(交番所) 옆인데 부인 세분이 큰길로 내려와 교번소를 끼고 북편 개천가로 돌아가는 모양이오. 의복은 대개 흰 적삼에 옥색치마인데 그 중 테두른 우산에 손수건 쥔 부인이 나이도 젊고 하이칼라입니다.”그리스도신문 '일본 예수교도 주지이 씨' 목판인쇄. 1901. 3. 14. ​매체사진 발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매일신보의 ‘촬영일순간’은 뉴스사진의 살아있는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데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매일신보의 ‘촬영일순간’ 중 ‘파출소전의 순사’(1913년 1월 21일자), ‘경성초유의 전차사고’(1929년 4월 23일자), ‘안창호 호송광경’(1932년 6월 9일자) 등은 특히 카메라메카니즘 기능과 함께 사진가의 능력에 의한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매일신보 '경성 초유의 전차 사고'. 1929. 4. 23.  ​동아일보 '안창호 호송 광경'. 1932. 6. 9. ​ [출처] : 정인영 사진가 :- 14.뉴스사진-매일신보 ‘촬영일순간’ 매체사진 발달의 중요 전환점 /충청타임스.2013. 4. 25.​​​15.일장기 말소사건 - 신문사들 손기정 선수 사진 일장기 삭제로 일제에 저항(좌)일장기가 선명한 일본신문 / (우) 일장기가 삭제된 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자(좌) 일장기 말소사건 사진의 원본. (우) '동아일보'(1936. 8. 25) 1판에 게재된 손기정 선수의 사진. 이 사진에는 일장기가 그대로 표시되어 있다. ​​지난 1905년(대한제국 광무 9년)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사이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착착 진행되어 온 일본의 한국말살야욕 정책이 5년 후 한일합방으로 절정에 이르렀다.​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은 다섯 개의 조문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친일 매국노가 있었으니 역사적으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이다.​이들은 조약체결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 이를 거부하고 있는 고종에게 온갖 협박과 회유로 반강압적 행위를 저지르며 일본의 마수노릇을 한 자들이다.​그 후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1936년 8월, 심하게 찌들어 살고 있던 민족에게 신념과 용기를 갖게 한 것이 손기정 선수의 제13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대회 우승소식이었다.​이 대회에서 손기정 선수가 1등, 남승룡 선수가 3등을 하는 쾌거를 이뤘다.​신문은 호외로, 방송은 뉴스로 이 소식을 보도하였고 전국이 손, 남 두 선수의 마라톤 제패승전보로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민족혼의 피가 들끓었고 새로이 조선의 맥박이 뛰게 되었다.​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패권을 놓고 조선이 낳은 한 청년에 의해 위대한 환희의 자긍심을 일깨웠다고 보도했다.​승전보가 전해지고 보름 후인 8월 23일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세계 제패 기념행사로 베를린올림픽 기록영화를 일본 오사카 아사히신문사로부터 입수하여 무료상영한다는 사고를 신문지면에 게재했다.​“이제야 올림픽의 막은 그쳤다. 그 설비와 규모에 있어서도 공전(空前)하였다. 그러나 인류 이십이억의 선두를 달린 우리의 손(孫), 남(南) 두 용사의 역사적 제패전을 보고 온 자 누구며 또 영예의 월계관을 싸워 얻은 두 선수의 씩씩한 거동을 보고 온 자는 몇몇이더냐, 혹은 전파가 전하였고 활자가 기록을 말하였다 할지라도 그 성전(聖戰)의 쾌절장절(快絶壯絶)한 실경(實景)을 보지 못한 것은 한 큰 한사(恨事)라 할 수밖에 없다.”'동아일보' 가슴의 일장기를 말소한 우승대의 손기정 선수. 1936. 8. 25. 제2판.​​동아일보는 8월 25일자 신문 지면에 손기정 선수 우승과 관련된 기사를 게재하면서 시상대에 서 있는 손 선수의 사진도 정몽석 함께 실었다.​‘머리엔 월계관 두 손엔 감람수(橄欖樹)의 화분(花盆)! 마라톤 우승자 우리용사 손기정군’이란 설명문이 붙은 이 사진은 1판에서는 일장기가 손기정 선수의 가슴(옷)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으나 2판에서 지워져 있었다.​일장기가 지워진 신문이 배포되자 일제 총독부는 즉시 동아일보의 배포를 중지시켰고 경기도 경찰부가 조사에 나섰다.​동아일보에 들어온 형사대는 사진부 암실과 제판실을 수색하고 가필한 사진과 사진제판 원판을 압수한 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선명하게 인쇄하여 다시 배포할 것을 강요하였다.​그런데 실제 손기정 선수의 옷에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이 처음 보도된 것은 동아일보가 아닌 조선중앙일보였다.​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승전보가 전해진지 5일 후인 1936년 8월 13일자 조간 4면에 손 선수의 시상 사진을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지웠으며 ‘머리에 빛나는 월계관, 손에 굳게 잡힌 견묘목, 올림픽 최고 영예의 표창 받은 우리 손 선수’라고 설명을 붙였다.​이 사진은 일본에서 받은 전송사진이었는데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인쇄도 선명하지 않아 경무국의 검열관도 일장기말소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따라서 독자들도 신문의 저항의도를 잘 알아보지 못하였다.​이렇게 신문의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결행된 손기정 선수 사진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인하여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하였고 동아일보도 8월 27일자로 무기정간을 당한 후 1937년 6월 2일 해제되었는데 이 9개월 동안 모진 고통을 겪었다.​동아일보의 장용서 편집자, 현진건 사회부장, 이길용 운동부기자, 이상범 화백, 신낙균 사진부장, 서영호, 송역수 사진부기자, 최승만 잡지부장이 연행되어 고등계형사들로부터 온갖 고문과 폭행, 사진수정과 게재경위는 물론 말소배경과 공산당관련 여부 등을 혹독하게 추궁 받았다.​이 사건이후 일제의 언론 길들이기 정책이 교묘하게 자행되었고 민족언론의 저항정신도 차츰 허물어져 갔다.미나미총독의 등장 이후인 이때 중일전쟁이 일어났으며 신문은 완전히 일제의 통제 아래서 허덕여야만 했다.문치장 '재판을 받고 퇴정하는 독립인사들'. 1930년대. '동아일보' 일제에 의해서 차압된 기획 연재물 '한식의 애수를 따라서' 제2회분의 김상옥 의사 사진과 관련 기사. 1925. 4. 28. ​ [출처] : 정인영 사진가 :- 15.일장기 말소사건 - 신문사들 손기정 선수 사진 일장기 삭제로 일제에 저항 /충청타임스.2013. 5. 2.​​​16.예술사진가들 - 일제 무자비한 탄압 속 예술사진 발달 '혼신의 열정'​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 창립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이해선, 한사람 건너 현일영.​​예술사진의 등장은 일제시대 1920년대에 이르러 취미로 사진을 찍으면서 금전이나 보수를 원하지 않는 사진가들로 하여금 사진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예술적 관점을 가지고 사진기술서적과 사진잡지를 구입하여 한 장의 예술사진을 만들기 위한 연구를 하고 사진활동을 예술로 인식하면서 카메라 메카니즘 기록과 표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예술사진을 이야기할 때 먼저 1913년 7월 1일자 매일신보 성우사진공모전에 ‘한가한 여름날의 적막한 오후’를 출품하여 2등 당선한 최창근을 살펴본다.​최창근은 1914년 미국 폴딘의 책을 번역하여 '자택독습 최신사진술'로 출판, 초보사진가들이 사진기술을 익힐 수 있게 하였다.​최창근은 이 책을 출판하기 이전부터 중앙기독청년회 학교에 사진과를 신설하고 학생들에게 사진을 가르치면서 사진예술의 대중화에 앞장서 사진교육의 선구자로 불렸다.​1937년 전후하여 구성된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 출신인 현일영과 이해선을 보자.이해선 '촌동', 1941년 일본사진연감 수록 작품.​이들은 일본의 사진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현실과 사사건건 간섭하고 제약하는 일본관원의 무자비함 속에서 아마추어 사진 발달에 혼신의 열정을 발휘하였다.​현일영은 사진을 생명으로 하고 독특한 모더니즘과 형식 미학을 추구하는 사진예술을 하는 등 치열한 사진가로서의 삶을 살았다.​현일영은 또 남들이 보지 못한 것들과 사진가들이 인식하지 못한 소재를 찾아 파격적인 앵글과 프레임으로 형상화한 사진을 찍었다.​경성아마추어 사진구락부의 창립회원이었던 이해선은 조선왕족 출신(황실의 인척)이면서 사진예술에 눈 뜬 사진가로 서양화처럼 빛에 의한 정물표현에 주안점을 두고 사진을 찍었다.​경성아마추어 사진구락부는 사진예술단체이면서 특히 민족정신이 투철하여 일제의 탄압을 무릅쓰고 일본인은 철저히 제외한 한국사람들만으로 회원을 구성했다.​현일영은 경성아마추어 사진구락부에서 사진예술 향상과 이론실기 발전에 대한 지도를 하고 사진인구도 늘리는데 힘썼다.​1933년에는 한국인을 중심으로 한 사진예술연구단체를 설립하였다.​진실된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을 사진의 생명과 사진의 힘이라고 믿으면서 사진예술의 길에 선 임응식은 피그먼트 인화방법과 연초점렌즈를 이용한 피사체변형촬영으로 특이하고도 실험적인 사진작품을 발표하였다.강대석 '어머니상' 1930년대.​​그런가 하면 예술단체의 신문화운동과 연계하여 사진활동이 행해지면서 무용계와도 교류하여 무희 최승희를 찍은 사진가로 신낙균이 있다.​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한 최승희를 인공조명을 이용하여 촬영한 신낙균은 경성사진사협회 창립과 이 협회가 운영하는 YMCA사진과에서 박필호와 함께 정규적인 사진교육으로 후진양성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또 형이 경영하는 사진기자재 가게에서 임응식을 만나 사진의 길에 들어선 이형록은 1939년 ‘전원’을 발표하여 정몽석 농촌의 서정적 풍경묘사를 하였다.​일제가 풍기문란이라 하여 제재하던 시기에 누드사진을 찍은 사진가가 강대식이다.강대식은 1930년대에 누구도 생각지 못한 누드 사진촬영으로 1918년 이후 외설로 판단한 일제의 규제를 피해갔다.​일제의 누드 사진에 대한 단속은 사진예술성의 가치판단에 의한 것 보다는 사회의 안녕을 해치고 풍속을 문란하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일제통치 하에서 사진예술 발전과 사진가 양성에 따른 사진인구의 양적 발달은 예술사진의 질적 향상과 다양한 사진사조로 이어졌으며 한국사진가만으로 민족 자긍심 고취가 되었다.​1933년 이전에 결성된 경성사구회가 한때는 신낙균의 지도를 받은 아마추어 사진가들로 수백명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그들이 어떠한 사진활동을 했는지는 전해진 바가 없다.​어쨌든 조선에 사진이 들어온지 40여년이 경과한 동안 사진예술의 끊임없는 교육과 양성, 그리고 그 사진가들의 활동이 일제의 다양한 방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성과를 이룸으로써 일반 사회단체에까지도 영향을 주었다.임응식 '양지' 연초점사진, 1935.강대석 '누드' 1930년대. 최창근 '한가한 여름날의 적막한 촌가', 매일신문 '성우사진공모전' 2등 당선작 1913. 7. 7.​ [출처] : 정인영 사진가 :- 16.예술사진가들 - 일제 무자비한 탄압 속 예술사진 발달 '혼신의 열정' /충청타임스.2013. 5. 9.​​​17.사진에 나타난 개화기의 서울 - 건축물·전경·역사적 순간 촬영… 기록사진의 출발점​민충식 '땔감장사' 1907. 대전과 금산 사이에서 촬영. 민충식, 아이사진, 1910~20년대, 젤라틴실버프린트, 20.4× 26.9cm,​​​사진가들이 개화기인 1880년대에서 1900년대에 등장하여 조선조의 말기, 서양문물과 제도의 수용, 서울 곳곳의 건축물과 역사적 순간들을 촬영하였다. 이것이 기록사진의 출발점이다.​이 시기의 기록사진은 사진수용의 선각자인 황철에 의해서 시작되었다.​황철의 아들 황치문이 쓴 황철의 일대기인 ‘어문공전기(魚門公傳記)’에 이런 글이 있다.​“1883년 계미(癸未) 고종(高宗) 20세 대궐과 관아에 출입하여 뛰어난 경승(景勝)을 촬영하여 내외국 친지들에게 알리고 개화한 진신(搢神:벼슬아치, 고관)들의 초상을 촬영하다.”​황철은 세계열강의 세력에 의해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이에 따른 변화의 조짐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자 이를 카메라로 찍어 기록했다.​1897년까지 10년여에 걸쳐 찍은 황철의 기록사진은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등 건축물 뿐 아니라 그것을 배경으로 벌여지고 있는 신식군대의 훈련 모습과 어린이들이 문화유적과 함께 있는 모습들을 찍었다.황철 '돈의문 부근' 1890년대. ​황철의 카메라는 서울 곳곳에서 민주의 숨결과 직업인들의 작업을 촬영하였다.​한성부청사, 농상공부청사 등 초상사진을 찍으면서 그 누구보다도 기록사진 작업을 착실하게 하였다.​황철은 또 건축사진을 촬영하면서 건물의 중요한 의미를 담은 것은 물론 건물 안과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적인 일에서부터 중요한 사건까지의 관심의 대상이 된 사람들을 건축물과 함께 촬영하였다.​황철의 사진에는 사람들의 관심사였던 왕궁과 관청, 문화적 가치와 서울의 각 전경들을 찍어 시대적 배경과 나라 안팎의 여러 모습들을 서울이라는 공간 속에서 카메라의 놀라운 사진세계로 이루어내었다.​또 1910년 전후의 시대변화와 서민들의 생활상, 서울의 실상들이 결혼과 장례, 교회,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어 주목을 끌었다.신칠현 '순종 운구 행렬' 1926. 운구 행렬 주위로 완전무장을 한 일본군이 보인다.​한편 민충식은 파노라마카메라로 서울의 전경을 촬영하였다.​민충식의 카메라는 이스트만 코닥에서 제작한 서키트 No.10카메라를 구입하여 인왕산기슭에서 북안산, 종로일대, 남산, 서울역, 서대문까지의 서울 전경을 찍었으며 남산 쪽에서도 서울 전경을 파노라마 사진으로 남겼다.​1910년 무렵의 황성기독교청년학교 사진과 출신 학생들 중에는 사진의 기록성과 의식을 갖고 사진활동을 한 경우가 있는데 민충식은 제1회 졸업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한 후 중국 상하이로 가 코닥 상하이지점에서 선전원, 판매원으로 활동하였다.​또 귀국 후에는 태평양 사진관을 설립하고 기록 사진에 충실했다.​개화기 이후인 1926년 서울에서 임금이 승하하였을 때의 장례장면을 찍은 사진가는 신칠현이다.민충식 '초상사진' 1930년대. ​신칠현은 순종 임금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지고 있는 현장에서 역사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일제치하 민족의 아픈 가슴을 기록하였다.​신칠현은 이 때의 기록사진으로 ‘순종운구행렬’과 ‘순종인산에 운집한 군중’, 순종운구현장에 모인 ‘상복을 입은 기생들’이 있다.​'순종운구행렬' 사진에 운구행렬 주위로 완전무장을 한 일본군이 보이고 있으며 '상복을 입은 기생들'은 순종인산일에 조선권번의 기생들이 연도에 모여 있는 뒤로 주선권번의 깃발이 보인다.신칠현' 자화상', 1929.7.​기록사진은 비록 소박해 보이는 면이 있으나 이것들을 통해 표현된 사진에는 일반적인 시대구분에서 치열하고 긴박한 내용들이 그대로 스며있어 그 의미가 상당히 크다.​더구나 외세의 각축이 오늘과 내일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혼란기였던 1900년대 전후의 사건과 그 안에서 몸부림치며 궁핍하고 복잡한 생활을 헤쳐간 민중의 기록을 남긴 사진가 황철, 민충식은 잊을 수 없는 개화기 기록사진가로서 역사에 남는다.​ [출처] : 정인영 사진가 :- 17.사진에 나타난 개화기의 서울 - 건축물·전경·역사적 순간 촬영… 정몽석 기록사진의 출발점 /충청타임스.2013. 5. 23.​​18.주요 사진사 - 1631~1945년 - 1909년 증명사진 사용 시작 최초의 여자 사진사는 이홍경​​한국 초기의 사진관. 연대 미상.(1900년대?)​​1631년 사진 원리 최초 전래 - 1916년 범죄자 첫 기록사진1925년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 신문사진 첫 취재방해 사건1929년 사진사 최초 개인전​한국 사진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근대 이후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유입된 사진기는 당시 문화적 충격과 함께 과학 기술의 발전을 선도했다.​그동안 한국 사진의 역사를 통해 한국 근대사의 변화상까지 살펴보았다.​연재를 마치며 한국 사진의 역사를 연도별로 정리한다.  ​1631년 진하사로 중국에 간 정두원 일행이 연경에서 선교사에게 기증 받아 가져온 ‘원경설’에 카메라 옵스쿠라의 기록이 들어 있어 우리나라에 사진의 원리가 최초로 전래됐다.​1871년 5월 31일, 미국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했을 당시 종군사진가 펠리스비토가 미국 함대를 방문한 조선인 문정관 요새지, 포로, 전투장면, 미군함대와 해병을 촬영했다. 미 해병이 해외 전투에 종군사진가를 파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여성사진사 이홍경이 운영하던 경성사진관에서 촬영한 사진, 1926.​1909년 2월 5일-세무주사 시험 때 면접 후 응시자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사진을 촬영했다. 우리나라에서 증명사진 사용이 처음 시작된 것이다.​1916년 6월 16일-서울 서대문감옥에서 범죄자들의 사진을 찍어 처음 기록사진으로 남겼다.​1919년 2월-고종이 승하했다. 매일신보가 고종의 승하 무렵부터 장례식까지 많은 사진을 지면에 실어 보도했다.​1919년 3월 1일-3·1운동이 일어났다. 3월 7일의 서울 만세시위현장 사진이 일본 아사히신문 3월 10일자에 게재됐다. 정환범이 스코필드가 찍은 3·1운동 관련 사진을 구두 밑창에 숨겨 중국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에 전달했다.​1925년 4월 20일-일본 경찰이 서울 종로에서 열린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취재하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사진기자를 폭행하면서 카메라를 파손하고 필름도 압수했다. 신문사상 최초의 신문사진 취재방해 사건이었다.​1926년 5월 18일-조선일보가 ‘조선여성이 가진 여러 직업’이라는 기획기사에 여성사진사 이홍경을 소개했으며, 서울 근화여고가 처음으로 여자사진과를 개설했다.​1930년 8월 26일-황해도 개성 남본정천임 사진관에서 김금옥과 장명옥을 모델로 한 나체사진을 촬영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제지당했다.​1931년 4월 20일-매일신보가 인천관측소 망원사진기로 찍은 일식사진을 지면에 게재했다.​1931년 9월-제2회 정해창 예술사진 개인전람회가 서울 낙랑다방에서 열려 캐비닛판 40점이 소개됐다. 1929년 3월 29일 서울 광화문빌딩에서 우리나라 사진사상 처음으로 개최한 제1회 개인전 이후 두번째였다.​1931년 10월 23~25일-서순삼 제1회 예술사진전람회가 조선일보 평양지국 주최로 조선일보 평양지국 2층에서 열려 작품 80점이 전시됐다.​1932년 9월-대구에 살고 있는 류진용이 7년간 연구 끝에 종이나 나무, 포목에도 사진을 박을 수 있는 사진감응액을 발명했다.​1933년 3월 25일-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활동하는 사진가들이 중심이 되어 남조선사진협회를 대전 춘일정 남성사진관에서 조직했다.​1933년 10월-평양에서 현일영이 사진전람회를 개최하고 전시작품 20점을 보여줬다.'고종의 운구행렬을 기다리는 군중들​1919년 3월 광화문 기념비전 앞의 군중. 이 사진은 흔히 3·1운동 관련 사진으로서 시위대를 기다리고 있는 군중들 모습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당시 일본 신문에서는 '고종의 운구행렬을 기다리는 군중들'로 설명되어 있다.​1935년-임응식이 강릉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사진가들로 강릉사우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출된 후 활발한 사진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임응식은 강릉우체국에 근무하고 있었다.​1937년 5월 13일-강릉사우회 제1회 사진전이 개최됐다.​1939년 1월 8일-체신국이 서울과 도쿄, 만주의 신경(新京)을 잇는 통신망을 정비하여 유선으로 전송사진 송수신을 개시했다.​1940년-사진기 공정가가 3할 인하되어 고시됐다. 상공성에서 열린 가격형성 중앙회 잡품부회에서 라이카 HB, 헥토르f3.5 포컬플레인 셔터부착 신품을 490원, 라이카 엘마3.5를 250원, 세넷타 신형인 넷타 f4.5 클리오셔터부착을 160원, 세미이콘타노바 f3.5R 콘퍼셔터를 150원으로 정했다.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 침탈의 일환으로 함경남도 부부7쌍의 체격을 측면에서 촬영한 사진. 총독부는 '인류학적인 특징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이들 가슴에 번호표를 붙여 촬영하기도 했다.함남 덕원 남자 9명의 체격 측정 기록사진. 상반신을 모두 벗고 찍었다. 1911.​​1942년 6월 22일-전조선영업사진가들이 서울 부미관 중강당에 모여 ‘사진으로 방첩, 사진으로 보국하자’는 취지 아래 조선사진회를 결성했다.​1944년 3월-일제총독부가 소득세법외 법률을 개정하고 16조에 사진용품, 카메라 확대기, 영사기 및 부속품과 함께 현상 인화용기, 사진용 건판필름, 감광지 등에 대해 물품세를 부과했다.​1945년 8월 15일-일본 천황이 항복 방송을 했다. 경향각지에서 해방축하시위가 열렸고 사진은 기나긴 일제 강점기의 압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게 됐다.;​ [출처] : 정인영 사진가 :- 18.주요 사진사 - 1631~1945년 - 1909년 증명사진 사용 시작 최초의 여자 사진사는 이홍경 /충청타임스.2013.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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